기시 노부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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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시 노부스케는 1896년 야마구치현 출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관료로 시작하여 만주국에서 산업 개발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거쳐 1957년 총리가 되었으며,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했다. 재임 기간 중 안보 투쟁으로 인해 사임했으며, 이후에도 자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국 및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다졌다. 그는 통일교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1987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시는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과 국제적 지위 회복에 기여했으나, 만주국 시절의 행적, 부정부패 의혹, 통일교와의 관계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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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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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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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기시 노부스케 |
로마자 표기 | Kishi Nobusuke |
일본어 표기 | 岸 信介 |
출생일 | 1896년 11월 13일 |
출생지 | 야마구치, 야마구치현, 일본 제국 |
사망일 | 1987년 8월 7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친척 | 이치로 사토 (형) 에이사쿠 사토 (동생) 히로노부 아베 (손자) 신조 아베 (손자) 기시 노부오 (손자) |
배우자 | 기시 요시코(1919년 11월 3일 결혼, 1980년 6월 사망) |
자녀 | 2명, 요코 포함 |
서명 | KishiN kao.png |
정당 | 자유민주당 (1955–1987) |
기타 정당 | 익찬정치회 (1941–1945) 호국동지회 일본민주당 (1952–1955) |
학력 | 도쿄 제국대학 졸업 |
직책 | |
재임 기간 | 1957년 1월 31일 ~ 1960년 7월 19일 |
천황 | 히로히토 |
부총리 | 미쓰지로 이시이 슈지 마스다니 |
이전 총리 | 이시바시 단잔 |
다음 총리 | 이케다 하야토 |
재임 기간 | 1957년 3월 21일 ~ 1960년 7월 14일 |
부총재 | 반보쿠 오노 |
간사장 | 미키 다케오 가와시마 쇼지로 후쿠다 다케오 가와시마 쇼지로 |
이전 총재 | 이시바시 단잔 |
다음 총재 | 이케다 하야토 |
총리 | 이시바시 단잔 |
재임 기간 | 1957년 1월 31일 ~ 1957년 2월 2일 |
이전 장관 | 이시바시 단잔 |
다음 장관 | 고다키 아키라 |
총리 | 이시바시 단잔 자신 |
재임 기간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7월 10일 |
이전 장관 | 시게미쓰 마모루 |
다음 장관 |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총리 | 도조 히데키 |
재임 기간 | 1943년 10월 8일 ~ 1944년 7월 22일 |
이전 장관 | '신설' |
다음 장관 | '폐지' |
총리 | 도조 히데키 |
재임 기간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0월 8일 |
이전 장관 | 사콘지 세이조 |
다음 장관 | 도조 히데키 |
중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재임 기간 | 1942년 5월 1일 ~ 1943년 10월 8일 |
재임 기간 | 1953년 4월 20일 ~ 1979년 9월 7일 |
칭호 및 훈장 | |
작위 | 정2위 |
훈장 | 대훈위국화대수장 훈1등욱일동화대수장 |
학위 | 법학사 (도쿄 제국대학, 1920년) |
기타 직책 | |
총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임명일 | 1982년 |
퇴임일 | 1987년 |
총재 | 하토야마 이치로 |
임명일 | 1955년 11월 |
퇴임일 | 1956년 12월 |
2. 생애와 경력
1896년 11월 13일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1920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농상무성 관료가 되었다. 1925년 농상무성이 상공성과 농림성으로 분리되면서 상공성에 배속되었고, 이후 요직을 거치며 혁신관료로 주목받았다.
1936년 10월에는 만주국으로 건너가 산업계를 장악하고, 1939년 3월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하여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강제 노동 동원과 아편 거래 연루 등 비인도적 행위와 부패 문제로 비판받기도 했다.[3][2] 그는 도조 히데키, 아유카와 기스케 등과 함께 만주국의 실력자로 부상하며 '이키삼스케' 중 한 명으로 불렸다.
1941년 도조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입각하여 태평양 전쟁 개전에 서명한 핵심 각료 중 한 명이었으며, 이후 무임소 국무대신 겸 군수성 차관을 지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피의자로 지목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3년 반 동안 구금되었으나, 냉전 심화와 미국의 대일 정책 변화 속에서 불기소 처분되어 석방되었다.
공직 추방이 해제된 후 정계 복귀를 모색하여, 1953년 동생 사토 에이사쿠가 속한 자유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의 대립 끝에 제명되었고, 1954년 하토야마 이치로 등과 함께 일본민주당을 창당했다. 1955년에는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을 주도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을 창당하고 초대 간사장이 되었다.
1956년 이시바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고, 이시바시 단잔 총리가 병으로 물러나자 1957년 2월 총리직을 승계했다. 총리 재임 중 가장 역점을 둔 정책은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이었다. 그는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권 회복과 대등한 미일 관계 구축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163], 개정 과정에서 1960년 국회 비준을 강행 처리하여 대규모 반대 시위인 안보투쟁을 촉발했다. 격렬한 국민적 저항과 사회 혼란 속에서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자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며 후쿠다 다케오 등을 후원했고,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통한 일본의 재무장을 평생의 목표로 삼아 자주헌법 제정 운동을 이끌었다. 1961년 방일한 박정희와 회담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에도 관여했으며, 1966년과 1972년을 비롯해 여러 차례 대한민국과 대만을 방문했다. 말년에는 통일교와 연계하여 활동하며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79년 정계에서 은퇴했고, 1987년 8월 7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친동생은 제61·62·63대 총리 사토 에이사쿠이며, 사위는 아베 신타로, 외손자는 제90·96·97·98대 총리 아베 신조[33]와 방위대신을 지낸 기시 노부오[34]이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1896년 11월 13일 야마구치현 요시키군 야마구치정 야켄야(현 야마구치시)에서 태어났다.[35] 그의 본적지는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타부세정이다. 아버지는 당시 야마구치현청 관리였던 사토 슈우스케였고, 어머니는 모요였다. 부부 사이의 다섯째 자녀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신스케가 태어났을 때 마침 야마구치에 와 있던 증조부 사토 노부히로가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이름 중 '노부(信)' 자를 따서 '신스케(信介)'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35]세는 나이로 3세 무렵, 아버지 슈우스케는 현청 관리를 그만두고 고향인 타부세정으로 돌아가 주조업을 시작했다. 가족은 타부세정 가미타부세 나카니시다누이 근처에서 주조장을 운영했다.[36] 이후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본가인 기시(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2. 2. 학창 시절
오카야마시립 내하산(內山下)소학교[37][38]를 졸업하고 오카야마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던 숙부 사토 마쓰스케(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 교수)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2년 1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야마구치현으로 돌아가 야마구치 중학교로 전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본가인 기시(岸)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1914년 야마구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예비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학업보다는 유흥을 즐겨 활동사진이나 연극을 자주 관람하였고, 제일고등학교 입학 시험 성적은 하위권에 머물렀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아즈마 에이, 미와 토시오와 성적을 다투었다.
1917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독일어 필기시험만으로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대학 시절에는 법률 공부에 전념했으며, 노트와 참고서 외에는 일반적인 독서는 거의 하지 않았고 유흥도 삼갔다[35]. 아즈마 에이와 함께 학업에 매진하며 강의 내용이나 참고서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대학 시절 초기에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져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 등을 읽기도 했으나, 점차 국수주의 성향의 사상가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에게 매료되었다. 상하이에서 오카와 슈메이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았고[39], 귀국 후에는 직접 기타 잇키를 찾아가기도 했다. 기시 본인도 오카와 슈메이가 자신의 사상, 특히 이후 만주국 문제 등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 기타 잇키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인물 중 하나"로서 "아마도 후에 배출한 우익 무리들과는 그 인물 식견에 있어서는 도저히 같은 날 논할 수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1920년 7월에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법학과(독일법)를 졸업했다. 재학 중 국수주의자 우에스기 신키치 교수가 이끌던 목요회와 흥국동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은사 우에스기와 친구 아즈마 에이는 기시에게 대학에 남아 학자의 길을 걸으라고 강하게 권유했지만, 기시는 관계를 선택했다. "이제부터는 산업이다"라며 당시 일류 관청으로 여겨지지 않던 농상무성에 들어가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40]. 이 결정에 대해 고향의 정치인이자 농상무성 근무 경험이 있던 우에야마 만노스케는 그를 질책하기도 했다.
2. 3. 관료 시절 (농상무성, 상공성, 만주국)
1896년 11월 13일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기시 노부스케는 구제 제일고등학교를 거쳐[30] 1920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농상무성에 들어갔다.[29] 입성 초기, 같은 고향 선배인 농상무성 상무국 상사과장 이토 붕키치로부터 업무를 위탁받았으며[70],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생 약 20명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맡게 되었다.[78]1925년 농상무성이 상공성과 농림성으로 분리되면서 상공성에 배속되었다. 당시 상사였던 요시노 신지와 함께 임시산업합리국의 키도 코이치 등과 중요산업통제법 입안 및 실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1933년 2월에는 상공대신관방 문서과장, 1935년 4월에는 상공성 공무국장으로 승진하며 자동차제조사업법 제정에 기여했다.
1936년 10월, 기시는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국 국무원 실업부 총무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1937년 7월 산업부 차장, 1939년 3월에는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 그는 계획경제와 통제경제를 기반으로 한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적으로 실시했다. 이는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모델로 삼아 군사 목적의 석탄, 철강, 전력, 무기 생산 증대에 초점을 맞춘 중공업 육성 계획이었다.[36][30][2]
기시는 만주국 산업 개발의 핵심 인물로 묘사되며[3], 나치 독일의 정책을 지지하고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해 자본주의 경쟁을 배제하는 "산업 합리화" 정책을 주장했다. 이는 군부의 "국방 국가" 구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군부로부터 만주국 경제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은 기시는, 5개년 계획 실행을 위해 군부가 독점하던 국영기업 방식이 비효율적이라 주장하며 사적 자본 유치를 설득했다.[30] 그 결과 1937년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MIDC)가 설립되었고, 닛산 자동차 창업주 아유카와 기스케를 사장으로 영입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102] MIDC는 당시 일본 정부 연간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52억엔의 민간 투자를 유치하며 제국 최대의 자본 프로젝트가 되었다.[2] 기시가 만주에서 구축한 정부 주도 경제 시스템은 이후 일본, 한국, 중국의 경제 발전 모델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3]
만주 경영에서 기시는 대장성 출신의 호시노 나오키 등과 협력하며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군, 재계, 관계에 걸쳐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이로 인해 만주국의 실력자들을 일컫는 "이키삼스케"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132], 같은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유카와 기스케, 마쓰오카 요스케와 함께 "만주 삼각 동맹"으로도 불렸다. 그는 육군과 관동군으로부터 주목받는 "혁신관료"의 핵심 인물이었다.[108]
그러나 기시의 만주국 통치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자이바츠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동자 임금을 최저 생계 수준 이하로 억제하는 정책을 폈으며,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빌미로 만주국과 중국 북부에서 중국인 강제노동을 동원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연평균 150만 명의 중국인이 만주국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것으로 추산된다. 푸순 탄광의 경우,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4만 명의 광부 중 매년 약 2만 5천 명이 사망하여 교체되어야 할 정도였다.[2]
기시는 만주국에서 법치를 무시했으며, 중국인에 대해 "법을 모르는 도적떼",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비하하는 등 식민 관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만주국을 독립된 국가가 아닌 일본의 이익을 위한 자원 공급지로 여겼으며, 이는 "만주국" 대신 "만주"라는 용어를 선호한 데서 드러난다.
만주 시절 기시는 스스로를 "동양의 플레이보이"라 칭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는 음주, 도박, 여성 편력을 일삼았으며, 특히 아시아 특급 열차를 타고 다롄을 오가며 주말을 보냈다. 이러한 사치스러운 생활은 아편 거래에 깊이 관여하며 얻은 막대한 자금으로 가능했다. 만주를 떠날 때 그는 정치 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정치 자금은 여과기를 통과시켜 정화된 것만 받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여과기 자체가 문제가 될 뿐, 깨끗한 물을 마신 정치가는 연루되지 않는다. 정치 자금으로 부정부패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여과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42]
1939년 10월, 기시는 일본으로 돌아와 코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상공차관으로 임명되었다.
2. 4. 도조 내각 각료 시절
1941년(쇼와 16년) 10월, 기시는 도조 히데키가 이끄는 도조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입각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정한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조서'에 서명하며 전쟁 결정에 참여했다. 전쟁 기간 동안 물자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 1942년(쇼와 17년)에는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3년(쇼와 18년) 3월 11일, 상공대신으로서 기존의 상공회의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전시 통제 경제를 이끌 상공경제회로 재편했다. 이는 훗날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의 전신이 되었다.[43] 같은 해 10월 8일, 도조 수상이 육군대신과 겸임하여 상공대신을 맡게 되자, 기시는 무임소대신으로 직위가 변경되었고, 동시에 다시 상공차관을 겸임하게 되었다.[44] 이로 인해 중의원 의원직도 사퇴해야 했다. 11월 1일에는 전황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상공성이 폐지되고 군수성으로 개편되었다. 군수대신은 계속 도조 수상이 겸임했으며, 기시는 무임소 국무대신 겸 군수차관이 되었다. 이는 사실상 강등에 가까운 조치였고, 이 일을 계기로 도조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44년(쇼와 19년) 7월 9일, 사이판섬이 미군에 함락되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궁중의 중신들 사이에서는 기도 고이치 내대신을 중심으로 조기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도조 내각을 퇴진시키려는 움직임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같은 해 7월 13일, 도조는 난국 타개를 위해 내각 개조 의사를 보였으나, 기시는 "사이판 함락으로 앞으로 본토 공습이 반복될 것이므로 군수차관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없다"며 강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도조가 사직을 요구했지만 기시는 이를 거부하며 내각 내 불일치를 드러냈다. 기시의 이러한 행동은 내각 개조를 좌절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46] 도조 측근인 시호우 료지 도쿄 헌병대장이 기시의 집을 찾아가 협박했지만, 기시는 "닥쳐라, 병사"라며 오히려 그를 내쫓았다고 전해진다.[35] 결국 중신들도 입각 요청을 거부하면서 도조는 내각 개조를 단념했고, 7월 18일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도조는 총사퇴 후에도 기시에 대한 불만을 품고 후임 총리에게 기시에게는 전관예우를 주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2. 5. 전범 용의자 체포와 석방
1945년 8월 15일 종전 후 고향인 야마구치시로 돌아갔으나, 군수차관 등을 역임한 경력 때문에[70]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으로부터 A급 전범 피의자로 지목되어 9월 15일 체포되었고, 도쿄의 스가모 구치소에 구금되었다.스스로 목숨을 끊는 정치인이나 군인도 있었지만, 기시는 재판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할 생각이었다.[70] 그는 "우리는 전쟁에서 진 것에 대해 일본 국민과 천황 폐하에게 책임이 있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승자가 패자를 처벌하는 것이고, 어떤 법률에 따라 우리를 처벌하든, 졌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침략전쟁이라는 말도 있겠지만, 우리로서는 궁지에 몰려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분명히 후세에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번 전쟁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고...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임을 천 년 후까지 명확히 하는 것이 개전 당시 각료의 책임이다", "끊임없이 성전의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옥중에서 쓴 『단상록』에서는 신일본이 해양국가로 재출발해야 하며 국민적 우수성이 여전히 피 속에 흐르고 있다고 적었다. 그는 "일본을 이렇게 혼란에 빠뜨린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정치인으로서 일본의 정치를 재건하고... 이것만큼은 해야겠다는 판단이 서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닌가"라며 전후 정계 복귀를 전쟁의 속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대해서는 "절대 권력을 이용한 쇼였다"고 비판했다. 또한 중국의 내전을 보며 공산화를 우려하고, 반공을 위해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48년 12월 23일,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7명의 A급 전범 사형이 집행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12월 24일, 연합군 당국은 기시를 비롯해 사사카와 료이치, 코다마 요시오 등 구금되어 있던 A급 전범 용의자 19명을 불기소 처분하고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병사한 2명을 제외한 17명은 즉시 석방되었다.[49]
기시가 기소되지 않은 이유로는, 전쟁을 실질적으로 결정한 1941년 11월 29일의 대본영 정부 연락회의에 그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 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휴전을 요구하고 결국 도조 내각을 붕괴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 전 미국 주일 대사 조셉 그루 등으로부터 개인적인 신뢰를 얻었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 또한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의 대일 정책이 변화한 것도 석방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다.
석방되었지만, 다른 많은 전쟁 관련자들과 마찬가지로 공직 추방 상태였기 때문에 공개적인 정치 활동은 할 수 없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와 함께 공직 추방이 해제되자 정계 복귀를 목표로 삼았다.
2. 6. 정계 복귀와 보수 합동
도조 히데키 내각의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중요 각료였기 때문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A급 전범 피의자로 지목되어 3년 반 동안 스가모 형무소에 구금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다른 전쟁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직 추방을 당했다.스가모 형무소 출소 다음 날, 기시의 절친이자 재계 거물이었던 후지야마 아이이치로로부터 그가 경영하는 일동화학의 감사직을 제안받고, 풍부한 활동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1949년 새해에는 긴자 교순샤 빌딩 별관 7층에 '기산사(箕山社)'라는 이름의 사무소를 설립하고, 그해 말부터 주식회사로서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공직 추방 중이던 기시는 동양펄프 회장직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 발효 이후, 동서 냉전이 심화되면서 일본을 점령했던 미국의 대일 정책은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는 방향으로 크게 전환되었다(역코스). 특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1950년 한국 전쟁 발발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를 가속화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공직 추방되었던 구 체제 인사들은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를 계기로 공직 추방에서 해제되어 복권되었다.
공직 추방이 해제되자 기시는 일본 재건연맹 설립이나 일본사회당 입당을 모색하는 등 정계 복귀를 목표로 삼았다. 이후 동생 사토 에이사쿠가 소속된 요시다 자유당에 입당하여 195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당내에서는 헌법조사회 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대미 추종 노선에 반발하며 대립하다가 1954년 하토야마 이치로 등과 함께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자유당에서 제명된 후, 기시는 하토야마 이치로 등과 함께 일본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 이후 보수 세력 통합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1955년 일본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당, 즉 보수합동을 주도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 창당에 기여했다. 자민당 창당 후 초대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2. 7. 이시바시 내각과 기시 내각 탄생
1955년 자유민주당이 결성되자 간사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총재 선거에서는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배했지만, 이시바시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시바시 단잔 총리가 질병으로 인해 직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기시는 총리대신 임시 대리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결국 이시바시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1957년 2월 기시가 후임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어 총리직을 승계했다.2. 8. 총리 재임 시절 (1957~1960)
1955년 자유민주당(자민당) 초대 간사장이 된 기시는 이듬해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배했으나, 이시바시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이시바시 총리가 병으로 물러나자 1957년 2월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
총리 취임 첫해,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었고, 인도네시아와 배상 협정을 체결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새로운 통상 조약을 맺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57년 기시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국가들을 순방하며 일본 중심의 아시아 개발 기금(ADF) 창설을 제안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기시 내각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이었다. 그는 기존 조약이 불평등하다고 보고, 일본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자 개정을 추진했다. 1957년 6월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협상을 시작했으며, 1960년 1월 새로운 미일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신안보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신안보조약 비준 과정에서 일본 내에서는 격렬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기시 내각이 1960년 5월 국회에서 비준안을 강행 처리하자,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안보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사회적 혼란과 국민적 비판이 거세지자 기시는 결국 1960년 7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63] 총리 퇴임 후에도 자민당 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2. 8. 1. 주요 정책
1957년 2월 이시바시 단잔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 기시는 외교 관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주요 정책 목표는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그리고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및 자주국방 추진이었다.취임 직후 외무대신을 겸임하며 발표한 외교 5원칙은 다음과 같다[51].
- 자유주의 국가로서의 입장 고수
- 대미 외교 강화
- 경제 외교 추진
- 국내 정치에 뿌리내린 외교
- 무역 중심의 대중국 관계
'''아시아 외교 강화'''
기시는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57년 이들 국가를 순방하며 배상 협정과 경제 협력을 추진했다. 이는 전후 일본의 국제 사회 복귀와 경제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복역 중인 B급 및 C급 전범들의 형기 감형을 연합국에 요청했는데, 이는 냉전 체제 하에서 일본이 서방 동맹국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과거 전쟁 범죄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기시의 가장 핵심적인 외교 정책은 1952년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이었다. 그는 기존 조약이 일본을 미국의 보호국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고 판단했으며[3], 조약 개정을 통해 미일 관계를 보다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확보하고자 했다.[163] 이는 장기적으로 일본국 헌법 제9조를 폐지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려는 그의 궁극적인 목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957년 6월 미국을 방문하여 미 의회 연설, 뉴욕 양키스 경기 시구 등 환대를 받으며 조약 개정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기시를 친미 성향의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주일 미군 기지에 대한 반대 여론 확산[8] 등을 고려하여 1957년 11월부터 조약 개정 협상에 동의했다.
1960년 1월, 기시는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새로운 미일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신안보조약)에 서명했다. 이 과정에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외상, 맥아더 주일 미국 대사와 함께 핵무기 반입에 관한 밀약을 맺었으나 공식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63].
그러나 신안보조약 비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 내에서는 조약 개정이 일본을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와 반미 감정이 고조되었다. 기시는 조약 비준에 반대하는 시위를 억누르기 위해 경찰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경찰관 직무 집행법 개정안'을 추진했으나, 일본 사회당과 노동조합,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로 철회해야 했다.
1960년 5월 19일, 기시 내각은 일본 사회당 의원들의 실력 저지를 뚫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국회 본회의장에서 신안보조약 비준안을 강행 처리했다(5·19 사건). 이러한 비민주적인 처리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극에 달했고,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안보투쟁)가 격화되었다. 6월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 준비를 위해 방문한 제임스 헤거티 백악관 대변인이 시위대에 의해 공항에서 발이 묶이는 사건(헤거티 사건)이 발생했으며[68][69], 6월 15일에는 국회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도쿄대학 학생 간바 미치코가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기시는 시위대를 향해 "나는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말하며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70],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은 취소되었고, 기시는 자위대의 치안 출동까지 검토했으나 아카기 무네노리 방위청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2][73]. 또한 고다마 요시오와 같은 우익 인사 및 야쿠자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67], 내각의 반대로 실행하지는 못했다.
1960년 6월 19일 신안보조약은 국회 통과 30일 후 자동으로 발효되었지만[75],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국민적 비판 속에서 기시는 6월 23일 사의를 표명했고, 7월 15일 내각은 총사퇴했다.
'''헌법 개정 및 자주국방 추진'''
기시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의 평화헌법, 특히 제9조의 전쟁 포기 조항을 개정하고 일본의 자주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이러한 목표를 위한 첫 단계로 여겼다. 1953년 자유당 의원 시절 당내 헌법조사회 회장을 맡았으며, 총리가 된 후에도 헌법 개정 의지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노선에 대한 도전이자 군사적 역할 확대를 모색하는 움직임으로, 국내외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안보투쟁으로 인한 퇴진으로 헌법 개정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일본 보수 세력의 지속적인 헌법 개정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2. 8. 2. 안보투쟁과 사임
1955년 미국 방문 당시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요구한 안보 조약 개정을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거부하는 자리에 함께했던 기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배경에는 일본이 자주적인 방위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인식과 미국 진영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기시는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고 안보 조약의 불평등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전부터 "총리는 외교와 치안에 힘써야 한다"고 말하며 "일본의 진정한 주권 회복"을 목표로 삼았던 기시에게 총리 겸 외무대신 자리는 안보 조약 개정을 추진할 좋은 기회였다.[70]1957년 1월, 미군 병사가 일본 농민 여성을 사살한 질라드 사건이 발생했으나 재판 관할권이 일본 측에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고, 미일 안보 관계는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51년 체결된 구 미일 안보 조약 하에서 일본은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지만 미국은 일본을 방위할 의무가 없으며, 일본은 미군 기지 사용에 대해 발언권조차 없다는 불평등한 현실이 국민들에게 명확히 드러났다.
기시는 안보 조약 개정을 "정치 생명을 건 대사업"으로 규정하고 총리 취임 직후부터 주일 미국 대사 더글러스 맥아더 2세와 비밀리에 협의를 시작했다. 기시는 "안보 조약이 일본 국민 다수에게 미국의 종속적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에 휘말릴 위험 때문에 반전 감정과 맞물려 안보 조약 반대 분위기를 키우고 있다"고 미국 측을 압박했다. 동시에 오키나와 반환 합의, 5년 후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 안보 개정을 통한 "상호 방위" 체제 구축 등의 비전을 제시하며 맥아더 대사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53]. 1957년 5월 20일에는 "국방 기본 방침"을 각의에서 결정하여 미일 협력을 통한 일본 안보 확보와 국력에 따른 점진적 방위력 증강을 명기함으로써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다.
1957년 6월, 기시는 미국을 방문하여 의회 합동 연설, 뉴욕 양키스 경기 시구, 백인 전용 골프 클럽에서의 골프 등 이례적인 환대를 받았다.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샬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 문서에 서명하고 수많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던 인물에게 주어진 "놀라운" 영예라고 평가했다. 당시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기시를 "자유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미국 국민의 충실하고 위대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1957년 11월, 기시는 미일 상호 안보 조약 개정안을 공식 제안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협상에 동의했다. 맥아더 2세 대사는 기시가 가장 친미적인 일본 정치인이며, 만약 미국이 조약 개정을 거부하면 그가 실각하고 더 반미적인 인물이 총리가 될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역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모에서 미국이 일본에서 "큰 베팅을 해야 할 시점"이며 기시가 "일본에 남은 유일한 베팅"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기시는 스나가와 투쟁이나 질라드 사건 등으로 고조된 주일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이용하여, 조약이 개정되지 않으면 일본 내 미군 기지의 안정적인 유지가 어려워질 수 있음을 미국 측에 시사하며 협상력을 높였다.[8]
조약 개정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예상한 기시는 시위 진압과 영장 없는 가택 수색을 가능하게 하는 등 경찰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경찰관 직무 집행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일본 사회당과 총평 등 좌파 성향의 시민 단체들은 1958년 가을 전국적인 반대 시위를 벌였고, 결국 거센 반대 여론에 밀려 기시는 법안을 철회해야만 했다.
1960년, 기시 내각은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권 회복을 명분으로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강행했다[163]. 이는 미국, 한국 등과 함께 동북아시아 냉전 체제에 더욱 깊이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국회 비준을 강행 처리하자 이에 반대하는 일본 기독교계를 비롯한 민중들의 대규모 시위, 이른바 안보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격렬한 반대 시위와 국민적 비난 속에서 기시는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총리직 사임 발표 다음 날인 1960년 7월 14일, 기시는 후임 총리 이케다 하야토의 취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총리 관저를 나서던 중 아라마키 타이스케(荒牧泰介)라는 65세 남성에게 흉기로 허벅지를 여섯 차례 찔리는 피습을 당했다.[10] 아라마키는 여러 극우 단체와 연관된 인물이었다.[10] 기시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봉합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으나,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10]
아라마키는 체포 후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10] 그는 기시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며, 안보 조약 처리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에 "기시에게 반성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진술했다.[10][11] 또한 안보투쟁 중 경찰과 충돌하여 사망한 간바 미치코의 유족을 만났다고 말하며,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기시에게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10] 그러나 기시의 딸 요코(陽子) 등 주변 인물들은 아라마키가 누군가에게 고용된 청부 살인범이며, 기시의 후임 총리 자리를 노리던 자민당 내 경쟁 파벌 지도자 오노 반보쿠가 배후에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0][11] 정작 기시 본인은 회고록에서 이 사건을 단 두 줄로 짧게 언급하며 이유를 알 수 없다고만 적었고, 그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 역시 당일 일기에 이 사건을 전혀 기록하지 않아[10]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 9. 총리 퇴임 이후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강행한 후 국민적 비판 속에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자민당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1961년 11월,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대한민국의 박정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회담하였다. 박정희는 과거 만주군 장교 경력을 언급하며 기시에게 일본의 "일본 정신의 효율성"을 칭찬하고 한국 발전을 위한 계획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12] 박정희는 특히 기시가 만주국에서 추진했던 경제 정책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시행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기시의 만주국 5개년 계획과 유사한 국가 주도형 경제 정책의 특징을 보였다.[12] 기시는 회담 후 일본 언론에 박정희의 발언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장교들이 사용했던 것과 거의 같아 "다소 당황스럽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2]
기시는 평생에 걸쳐 일본국 헌법 제9조를 개정하여 일본의 재무장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65년에는 일본 재무장이 "일본의 패배와 미국의 점령의 결과를 완전히 없애는 수단"이며, "일본 국민이 일본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되찾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3]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헌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말년에는 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케다 하야토와 자신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가 헌법 개정을 막았다며 비판했다. 그는 자주헌법 제정 국민회의 회장, 자주헌법 기성 의원 동맹 회장 등 관련 단체의 직책을 맡으며 헌법 개정 운동을 계속했다.[31]
총리 퇴임 후에도 민간 외교 차원에서 여러 차례 해외 순방에 나섰다. 1966년과 1972년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대한민국과 대만을 방문했다. 또한 일미협회 회장, 아시아 국회의원 연합 의원단장, 일한협력위원회 위원장, 필리핀 협회 회장 등 다양한 국제 교류 관련 직책을 역임했다.[31]
1979년 중의원 의원직에서 은퇴하며 공식적으로 정계를 떠났지만, 이후에도 자민당 내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계자로 후쿠다 다케오 등을 지원하며 자민당 우익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고, 이 시기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말년에는 통일교와 연계하여 자주헌법 제정 운동과 스파이 방지법 제정 운동에 힘썼으며, 사위인 아베 신타로를 총리로 만들고자 노력했다.[111]
수개월간의 투병 끝에 1987년 8월 7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동생은 제61·62·63대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이며, 외손자는 제90·96·97·98대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33]와 방위대신을 역임한 기시 노부오[34]이다.
3. 정책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국제적 지위 회복과 국내 체제 정비에 중점을 둔 정책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이는 일본 국내에서 격렬한 안보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및 경제 협력을 모색하며 일본 중심의 아시아 개발 기금(ADF) 구상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주변국의 경계와 미국의 미온적 태도로 실현되지 못했다.
내정 면에서는 경찰관 직무 집행법(경직법) 개정을 통해 경찰 권한 강화를 시도했으나 거센 반발로 무산되었고, 일본 교직원 조합(일교조)과의 대립 속에서 근무 평정 제도를 도입했다. 한편으로는 국민 의료 보험, 최저 임금 제도, 국민 연금 등 사회 보장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성과도 있었다. 기시는 일본의 재무장을 목표로 헌법 개정, 특히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일관되게 주장했으나, 개헌에 필요한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그의 정책들은 전후 일본의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재무장 추구는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3. 1. 외교 정책
총리가 된 후 기시는 외교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미·일 관계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외무대신 시절에는 “자유주의 국가로서의 입장 고수”, “대미 외교 강화”, “경제 외교 추진”, “국내 정치에 뿌리내린 외교”, “무역 중심의 대중국 관계”라는 외교 5원칙을 발표하기도 했다.[51]1957년에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하여 배상 협정과 경제 협력을 추진했다. 같은 해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었고, 인도네시아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새로운 통상 조약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 아시아 개발 기금(ADF) 구상 ===
1957년 기시는 "아시아에 의한 아시아의 경제 개발"이라는 구호 아래 일본 중심의 아시아 개발 기금(ADF)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냉전으로 중국과 북한 시장 접근이 어려워지자, 동남아시아를 일본 상품의 시장이자 원자재 공급원으로 확보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또한,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시아의 경제 성장을 원했지만 직접적인 자금 지원은 꺼렸는데, 기시는 일본 주도의 ADF(약 5억달러 규모의 저리 대출 및 원조)를 통해 미국 내 입지를 강화하고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했다.
ADF 추진을 위해 기시는 1957년 5월 인도, 파키스탄, 미얀마, 태국, 실론(스리랑카), 대만을 방문했고, 11월에는 남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순방하며 ADF 가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부정적 기억, 일본의 의도에 대한 불신, 신식민지적 관계에 대한 우려, 냉전 하에서의 중립주의 노선, 미국의 배후 조종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 등으로 인해 미온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인도의 네루 총리는 인도의 중립 노선을 이유로, 파키스탄의 수라워르디 총리는 양자 간 원조를 선호한다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다. 결국 과거 대동아공영권을 연상시키는 이 구상은 관련국들의 비협조와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실패했으나, 훗날 아시아 개발 은행의 형태로 일부 계승되었다.[7]
===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
기시는 미국이 제정한 전후 체제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일본이 강대국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중간 단계로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을 추진했다.[3] 1957년 6월 미국을 방문하여 미 의회 연설, 뉴욕 양키스 경기 시구 등의 환대를 받았다. 당시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그를 "자유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미국의 충실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1957년 11월, 기시는 조약 개정을 공식 제안했고, 아이젠하ワー 행정부는 협상에 동의했다. 당시 주일 미국 대사 더글러스 맥아더 2세는 기시가 가장 친미적인 일본 정치인이며, 조약 개정을 거부하면 반미적인 인물이 총리가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기시는 스나가와 투쟁이나 지라드 사건 등으로 고조된 주일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이용하여 조약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미군 기지 유지가 어려울 수 있음을 미국 측에 시사했다.[8]
조약 개정에 대한 국내 반발을 예상한 기시는 경찰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경찰관 직무 집행법(경직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일본 사회당과 총평 등이 주도한 격렬한 반대 운동으로 인해 1958년 가을 철회해야 했다.
1960년 1월, 기시는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새로운 미일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신안보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기존 조약의 불평등한 요소를 상당 부분 해소했지만, 일본이 다시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광범위한 반대에 부딪혔다.
=== 안보 투쟁과 퇴진 ===
신안보조약 비준을 위한 국회 심의는 일본 사회당의 격렬한 저항으로 난항을 겪었다. 기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 예정일(6월 19일)에 맞춰 비준을 완료하기 위해 1960년 5월 19일, 경찰력을 동원하여 야당 의원들을 회의장에서 끌어내고 자민당 단독으로 조약안을 강행 처리했다("5·19 사건"). 이 비민주적인 처사에 대한 반발로 반대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6월 10일에는 아이젠하워 방일 준비차 방문한 제임스 헤거티 백악관 대변인이 탄 차가 시위대에 둘러싸여 미 해병대 헬리콥터로 구조되는 사건(헤거티 사건)이 발생했다.[9] 6월 15일에는 국회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도쿄대학 학생 간바 미치코(神田道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기시는 자위대 동원과 고다마 요시오(児玉誉士夫) 등 우익 세력의 폭력배 동원까지 고려했으나 내각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방일은 취소되었고, 기시는 6월 16일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신안보조약은 6월 19일 자정을 기해 자동으로 발효되었으며[75], 기시는 7월 15일 공식 사임하고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 외교 관련 비리 의혹 ===
기시 내각 시기에는 외교 정책과 관련된 부패 의혹도 제기되었다. 특히 1958년 인도네시아와의 전쟁 배상 협정 과정에서 기시와 만주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기노시타 상사 등 특정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의혹이 있다. 배상금은 현금이 아닌 물품으로만 지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고위 정치인들에게 뇌물이 건네졌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또한, 미국의 비밀 자금인 M펀드를 기시가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3. 2. 내정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제2차 기시 내각을 발족시킨 기시는[53]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국민적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경찰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경찰관 직무 집행법(경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경찰에게 영장 없는 가택 수색과 시위 진압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그러나 이 개정안은 일본 사회당과 일본 노동조합 총평의회(총평)를 중심으로 한 좌익 단체와 시민 사회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데이트도 할 수 없는 경직법", "『오이코라 경관』(불심검문 시 고압적인 경찰관을 지칭하는 속어)의 재림"과 같은 네거티브 캠페인이 벌어지며[70] 법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자, 기시 내각은 결국 1958년 가을 개정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시는 일본 교직원 조합(일교조)과의 대립 속에서 교직원에 대한 근무 평정 제도 도입을 추진하여 '근평 투쟁'이라 불리는 반발을 낳기도 했다.[70]
기시 내각은 경직법 개정 외에도 방첩법(비밀 보호법) 제정, 방위청의 성(省) 승격, 내정성 설치와 관선 지사 제도 부활[59], 독점 금지법 개정, 소선거구제 도입 등 여러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56][57] 이 중 내정성 설치 법안은 폐기되었고,[58] 대신 1960년 자치성이 설립되었다.
한편으로는 국민 의료 보험 제도를 확립하고, 최저 임금 제도와 국민 연금 등 사회 보장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60][61]
기시는 총리 재임 기간 내내 일본의 재무장과 관련하여 헌법 개정, 특히 일본국 헌법 제9조의 개정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하지만 1958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개헌 발의에 필요한 의석(3분의 2)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53] 그는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고 국제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는 그의 주요 정치적 목표 중 하나였다.
4. 가족 관계
1919년, 기시는 사촌인 기시 요시코와 결혼하고, 그녀의 아버지인 시족 기시 노부마사에게 입적하여 기시(岸) 성을 쓰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921년에 아들 노부카즈가, 1928년에 딸 요코가 태어났다.
기시의 딸 요코는 정치인이자 후에 외무대신을 지낸 아베 신타로와 결혼하였다. 요코와 신타로의 차남은 제90·96·97·98대 일본 총리를 역임한 아베 신조이다.[33] 삼남 기시 노부오는 출생 직후 기시의 아들 노부카즈에게 입양되었으며, 2020년에는 방위대신이 되었다.[25][34]
기시의 친동생은 제61·62·6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사토 에이사쿠이다.
5. 논란
기시 노부스케는 그의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논란에 휩싸였다. 주요 논란으로는 만주국 시절 관동군과 결탁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의 문제[41][42], 총리 재임 기간 중 인도네시아와의 배상 협정 체결 과정 및 M펀드 유용 등 부정부패 의혹[14], 그리고 반공주의를 매개로 통일교(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와 깊은 관계를 맺고 지원한 사실 등이 지적된다.[15][16][81][17][18][19][20][21][22][23][24]
5. 1. 만주국 시절 행적
1936년 10월, 기시는 만주국 국무원 실업부 총무사장에 취임하며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1937년 7월에는 산업부 차장, 1939년 3월에는 총무청 차장 자리에 올랐다. 이 시기 기시는 계획경제와 통제경제를 기반으로 한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을 주도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는 대장성 출신으로 만주국 재정부 차장 및 국무원 총무장관을 지낸 호시노 나오키 등과 협력하며 만주 경영에서 능력을 보였다.또한, 기시는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 닛산 콘체른 총수 아유카와 기스케, 리미 하지메 등 군부, 재계, 관계의 주요 인물들과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시이나 에츠사부로, 오히라 마사요시, 이토 마사요시 등 후일 일본 정계의 중요 인물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만주국의 실력자 그룹인 "이키 산스케(二キ三スケ)"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같은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유카와 기스케, 마쓰오카 요스케와 함께 "만주 삼각 동맹"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역사학자 하라 아키히사는 기시가 만주에서 관동군이라는 최고 권력 집단을 상대하며 권력을 장악하는 수완을 익혔으며, 이것이 그를 정치가로서 성장시킨 주요 요인이었다고 평가한다.[41]
만주 시절부터 기시는 정치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는데, 그 자금의 출처가 주로 만주와 중국에서의 아편 밀매였다는 의혹이 있다. 그가 만주를 떠날 때 남긴 것으로 알려진 "정치 자금은 여과기를 통과한 깨끗한 것을 받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여과기가 문제될 뿐, 받은 정치가는 깨끗한 물을 마신 것이니 관계없다"는 말은 그의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논란을 더한다.[42]
5. 2. 부정부패 의혹
정치학자 리처드 새뮤얼스는 기시 노부스케 총리 시절 광범위한 부정부패가 있었다고 지적했다.1958년 2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일본을 개인적으로 방문했을 때, 도쿄 경찰은 국빈 방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호를 거부했다. 이에 기시는 자신의 측근인 야쿠자 두목 고다마 요시오에게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수카르노의 경호를 맡기도록 요청했다. 수카르노 방문 기간 동안 기시는 인도네시아와 배상 협정을 협상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점령으로 인한 피해 보상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 배상 협정은 일본의 과거 행위에 대한 반성보다는 기시 자신의 측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계약을 체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기시는 배상금을 현금이 아닌 물품 형태로만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58년 4월, 기시는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수반드리오에게 특정 업체인 기노시타 상사가 배상금으로 제공될 선박을 건조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기노시타 시게루가 운영하던 이 회사는 만주 시절부터 기시와 친분이 있는 금속 상인이었지만, 선박 건조 경험은 전무했다. 더 낮은 가격에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다른 일본 조선업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약이 추진된 점은 특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기시 총리 시절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체결된 배상 계약은 대부분 1930년대 만주에서 기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업가들이 운영하는 회사들에게 돌아갔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배상 계약 과정에서 고위 인도네시아 정치인들이 뇌물을 수수했으며, 정작 일반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배상금으로 인한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 일본 경제 안정을 위해 조성된 미국의 비밀 자금인 M펀드를 둘러싼 의혹도 제기되었다. 당시 미국 법무부 차관보였던 노버트 슐라이는 "기시 총리를 시작으로 이 펀드는 그들의 통제 아래 있는 개인들의 사유 재산처럼 취급되었다. 그들은 펀드에서 막대한 금액을 자신의 사적, 정치적 목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시는 (당시 부통령 리처드 닉슨)으로부터 펀드를 장악한 후 1조엔의 재산을 챙겼다"고 주장하며 기시의 M펀드 사유화 및 유용 의혹을 제기했다.
5. 3. 통일교와의 관계
1960년대 중반부터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통일교(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와 관계를 맺었다.[14] 통일교는 기시의 반공주의적 신념을 공유했으며, 자민당(LDP)으로부터 사실상 기소를 면하는 보호를 받았다.[14] 기시는 공개적으로 통일교 지도자 문선명(1920~2012)의 친구로 알려졌으며,[15] 통일교의 일본 본부는 한때 기시가 소유했던 도쿄의 부지에 세워졌다.[16]1984년 11월 26일, 문선명이 미국에서 탈세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자, 기시는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게 서한을 보내 문선명의 조기 석방을 탄원했다.[81] 서한에서 기시는 "문 선생은 현재 부당하게 구금되어 있습니다. 귀하의 협조를 얻어 저는 무엇보다도 가능한 한 빨리 그가 부당한 구금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적었다.[81] 이는 통일교의 강압적인 신자 모집 등이 일본 내에서 사회 문제로 부각되던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으며,[17] 기시는 문선명을 "성실하고 귀중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17]
기시 가문 및 아베 가문과 통일교의 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18] 자민당과 통일교의 유착 관계 역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19][20][21]
기시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22년 피살되었을 때, 용의자 야마가미 데쓰야는 자신의 어머니가 통일교에 거액을 헌금하여 가정이 파탄났고 형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에 원한을 품었다고 진술했다.[22][23] 그는 아베 신조가 통일교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범행 대상으로 삼았으며, 아베와 기시가 일본 내에서 통일교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4]
6. 평가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평가는 그의 행적만큼이나 복합적이다. 만주국에서의 활동과 도조 히데키 내각의 각료로서 태평양 전쟁 개전에 관여한 이력 때문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피의자로 3년 반 동안 구금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111] 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아 비판의 주요 근거가 된다.
전후 냉전 시기 미국의 정책 변화로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후 정계에 복귀하여 자유민주당 간사장,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 총리 재임 중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을 추진하여 현재의 미일 동맹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점은[111] 전후 일본의 외교 및 안보 노선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인 60년 안보 투쟁을 강행 돌파하여[111] 민주주의 절차를 경시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정계 은퇴 후에도 '쇼와의 요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111] 통일교회와 연계하여 자주헌법 제정 운동과 스파이 방지법 제정 운동 등 우익적인 활동을 주도했다.[111] 이러한 행보는 일본 보수 우익 세력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게 했으며, 동시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반성 없는 태도와 권위주의적 면모에 대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게 만들었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사위 아베 신타로와 외손자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도 이어져 현대 일본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33][111]
7. 기타
1960년 7월 14일, 이케다 하야토의 총리 취임을 축하하는 파티를 위해 총리 관저를 나서던 중 흉기를 든 괴한에게 습격당했다.[10] 범인은 여러 극우 단체와 연관된 65세의 무직 남성 아라마키 타이스케(荒牧泰介)였다.[10] 아라마키는 기시의 허벅지를 여섯 차례 찔러 심한 출혈을 일으켰으나, 다행히 주요 동맥을 비껴가 목숨을 건졌다.[10] 기시는 즉시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30바늘을 꿰매는 치료를 받았다.[10]
아라마키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고, 1962년 5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10] 그는 무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 후 2년간 상당한 금액의 보석금을 낼 수 있었다.[10] 아라마키는 범행 동기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고, 기시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10] 그는 경찰 조사에서 안보 조약 위기 대처에 대한 기시의 미숙함에 분노하여 "기시에게 후회를 느끼게 하려 했다"고 진술했다.[10][11] 그러나 기시의 측근들은 이를 꾸며낸 이야기로 보았으며, 자민당 내 파벌 갈등에 따른 사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10][11] 정작 기시 본인은 회고록에서 이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며 이유를 알 수 없다고만 적었고, 동생 사토 에이사쿠는 당일 일기에 이 사건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10]
기시는 말년에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라는 별명으로 불렸다.[94] 마른 얼굴에 덧니가 있는 외모였으며, "그래서 말이죠(それでですよ)"나 "뭐랄까(ナンだな)" 같은 말버릇이 있었다. 만주 시절에는 요정에서 술과 게이샤를 즐기고 군부나 아편 업자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대담함을 보였다고 한다. 밝고 사교적인 인상이었지만,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기시를 "작은 니힐리스트"라고 평했다.[85]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기시를 "솔직하고 정직한 조슈 사람"이라 평했다.[86]
기시는 오가타 다케토라, 쇼리키 마쓰타로 등과 함께 미국 CIA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87] 기시에게 부여된 코드네임은 밝혀지지 않았다.[88] 2007년 미국 국무부는 냉전 시기 일본을 반공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기시 내각, 이케다 하야토 내각 및 구 사회당 우파 세력에게 비밀 자금을 제공하고 공작 활동을 벌이며 일본 정치에 개입했음을 공식 인정했다.[89][90] 자금 지원은 기시 측이 먼저 요청했으며, 1958년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지다 존슨 행정부 시기에 중단되었다.[91][92]
기시는 "정치는 힘이고 돈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내각 시기에 금권 정치의 폐단이 시작되었다는 비판도 있으며, 하토야마 이치로는 기시를 가리켜 "그렇게 돈에 더러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시 자신은 다나카 가쿠에이의 자금 동원 방식은 위험하다고 보았으며, "돈은 여과기를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기시는 전후 배상과 관련하여 몇 차례 독직 의혹에 휩싸였으나, 모두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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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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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安保改定の真実(8)完】岸信介の退陣 佐藤栄作との兄弟酒「ここで二人で死のう」 吉田茂と密かに決めた人事とは…(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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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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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大日本・満州帝国の遺産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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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権力と陰謀 : 元KCIA部長金炯旭が語る
合同出版
[81]
웹사이트
【独自】安倍家と統一教会との“深い関係”を示す機密文書を発見 米大統領に「文鮮明の釈放」を嘆願していた岸信介
https://www.dailyshi[...]
20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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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権力と陰謀 : 元KCIA部長金炯旭が語る
合同出版
[83]
서적
派閥と多党化時代
雪華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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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異例国葬、党内に配慮 全額国費、首相は正当性強調:朝日新聞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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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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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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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自省録-歴史法廷の被告として-
新潮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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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CIA Records - Name F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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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202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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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岸信介とCIAの密接な関係 自民党にも金の流れ? 〈週刊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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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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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左派弱体化へ秘密資金 米CIA、保革両勢力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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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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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週刊文春
200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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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自民にCIA資金
しんぶん赤旗
200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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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名越健郎×春名幹男:「米露公文書」で解き明かす日本外交「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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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潮社 Fore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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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57歳で初当選、岸内閣の官房長官に 「飄逸とした仕事師」椎名悦三郎(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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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経済新聞社
201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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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昭和の妖怪 岸信介
中公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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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岸信介と統一教会を仲介したのは謎の「踊る女性教祖」? 警視庁公安部が捜査していた政治家の実名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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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イリー新潮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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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北村サヨ(日本大百科全書、デジタル版日本人名大辞典+Plus、世界大百科事典第2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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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トバンク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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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村サヨ(20世紀日本人名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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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トバンク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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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世紀日本人名事典
日外アソシエ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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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軍国主義復活と右翼―WACL大会をめぐる右翼の現状―
日本共産党中央委員会
197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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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岸信介の “私邸” が統一教会の本部に…「西郷どん」と「高峰三枝子」がつないだ数奇な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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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rt FLASH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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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日本統一運動史 52 全国的規模での統一教会の最初の決断式
https://www.kogensha[...]
光言社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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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日本統一運動史 54(最終回) 宗教法人・統一教会の出発
https://www.kogensha[...]
光言社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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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徹底追及 統一協会 闇勢力編(下)岸信介元首相と懇意 “勝共運動飛躍の契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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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んぶん赤旗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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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安倍3代と統一教会 半世紀余りの“組織的関係”の原点 「信者が40人いれば1人当選させられる」【報道の日2024】(2/6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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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
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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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統一教会と自民の密接な関係 岸信介氏から始まった3代の因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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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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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統一教会・文鮮明“お言葉集”発掘「安倍晋太郎は私と契約書を書いた」「福田赳夫と中曽根は私が首相にした」
https://bunshun.jp/a[...]
文春オンライン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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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文鮮明総裁聖和節記念】日本を愛した文先生の足跡 15 南平台から松涛へ(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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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言社
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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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悼の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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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際勝共連合
201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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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反共』陣営と連動する勝共連合
197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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概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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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しい憲法をつくる国民会議(=自主憲法制定国民会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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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日本はとんでもない間違いをした」岸信介、安倍晋太郎、安倍晋三…3代続く関係性から見える旧統一教会が目指した“国家宗教”【報道特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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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テレビ
202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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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75回国会 衆議院 法務委員会 第19号 昭和50年5月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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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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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党と旧統一教会 右派とのつながり深く 長年親交…別れられる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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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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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統一教会=勝共連合ーその右派運動の歴史と現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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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における統一教会の活動とその問題点―活字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批判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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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際宗教研究所 宗教情報リサーチ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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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協会 危険な二つの顔 反社会的カルト集団 勝共連合 反共・反動の先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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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んぶん赤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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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連の報道への当研究所の見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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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毎日新聞
197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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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統一運動史ー文鮮明先生御夫妻と日本の統一教会および統一運動の歩み
光言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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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第95回国会 参議院文教委員会 第2号 (昭和56年10月22日)発言№284 佐藤昭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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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国会図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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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統一協会支持派が客を招き晩さん会
朝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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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我々は世界を支配できると思った」米・統一教会の元幹部が語った”選挙協力”と”高額報酬”の実態【報道特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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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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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統一教会系と歩んだ安倍氏「3代」…スパイ防止法を巡る歴史から闇を読み解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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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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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特定秘密保護法と新聞メディアの記憶 ─刑法改正およびスパイ防止法論議との比較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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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団体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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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パイ防止法制定促進国民会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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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共運動50周年記念インタビュー 元参議院議員 堀江正夫氏に聞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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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際勝共連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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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真の父母様と統一運動の歴史 1970-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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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言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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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安倍晋三元首相」暗殺の闇 なぜ祖父・岸信介は「統一教会教祖」の釈放嘆願書をレーガン大統領に送っ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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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イリー新潮
20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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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ポスト小泉の麻生氏と安倍氏、祖父が争った国のかたち―闘い方が時代を占う指標に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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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理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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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學館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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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殊切手「日米安全保障条約改定50周年」の発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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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郵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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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の妖怪」の素顔 古沢襄(杜父魚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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岸と金丸、対日政界工作=親台派取り込み-中国建国70年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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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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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潔先生二十年祭記念 聴雨録 - 師弟座談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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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ons between TSUJI Masanobu and Prime Minsiter KISHI Nobus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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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ination Database Nobusuka Ki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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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ination Database Country of nominee is: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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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月6日】1958年(昭33) デビュー4打席4三振 その後の長嶋茂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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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佐美徹也の記録巨人軍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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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日本の現職の総理大臣としては初めて始球式登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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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アベノミクス”より、はるかに大胆かつ、実効性があった“イケノミクス”。その池田首相も広島の弱さだけは……
http://column.sp.bas[...]
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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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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波瀾と浪漫の球団。マリーンズの前身、オリオン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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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ベースボール(2018年5月27日作成)
201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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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ロッテ創業者、重光武雄氏 日韓両国で足跡 愛されるブラン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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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2020年1月19日作成)
202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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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球団黒字」夢見て奔走 他業界も研究 ロッテオーナー重光武雄さん死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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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2020年1月19日作成)
202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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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記者に逆取材も、第三者の声聞く柔軟さ/重光氏悼む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2020年1月19日作成)
202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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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V特集「日系アメリカ人の“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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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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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民国家アメリカの歴史
岩波書店
201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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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Don't Be a Bridge, Be a P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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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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チャーチル国葬(有馬純達・朝日新聞特派員)2007年4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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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記者クラ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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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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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4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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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財団図書館 「興四海野春風―2002 20年の歩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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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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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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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正伝 佐藤栄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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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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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正伝 佐藤栄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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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ようこそ、田布施町郷土館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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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布施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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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佐藤榮作宰相の遺品展示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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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布施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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ごあいさ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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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山旧岸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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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劇画大宰相 第3巻 (講談社+α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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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国会図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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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먼나라 이웃나라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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